2014년 9월 23일 화요일

2014.8.5. 북서울꿈의숲







 

 

문화와 교양

 누구나 암묵적으로 자신의 관점을 지니고 있고, 이 관점을 적용하여 일상적인 선택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 자신이 지닌 관점을 세밀하게 살펴보고 일관성 있게 가다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는 많은 사람의 관점이 치열한 고민과 성찰의 결과 생긴 것이라기보다 성장과정에서 전통의 영향이나 부모나 선생님 등 주변의 권위적 존재들의 영향, 또는 일상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내가 했던 선택들을 사후에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그들의 선택에는 일관성이 결여되고 통일성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례를 자주 볼 수 있다. 이처럼 일관성이 결여되더라도 평소의 일상생활을 해 나가는 데는 별문제가 없지만, 결혼이나 직업의 선택과 같이 개인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할 때일수록 뚜렷한 관점의 결여 때문에 혼란을 느끼게 될 가능성이 높다. 또 내 스스로 정립한 관점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형성된 관점에 따라 선택을 하다 보면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 의미를 느끼기 힘들게 되고,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허무한 느낌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형식적으로는 분명 내가 한 선택이지만, 선택의 기준이 되었던 관점이 나의 의식적 결정에 의해 마련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영향에 의해 수동적으로 형성된 것이다보니, 실질적으로는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하여 선택해 준 것과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 p. 14

매트릭스

Neo: This isn't real?
Morpheus: What is real? How do you define real?
If you're talking about your sense,
what you feel, taste, smell, or see,
then all you're talking about
are electrical signals interpreted by your brain
네오: 이게 진실이 아니란 말인가?
몰피어스 : 진실은 어떤 것을 말하지?
너는 어떻게 진실을 구분하지?
만약 너가 말하는 진실이 너의 감각 그러니까
너가 느끼고 맛보고 냄새 맡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지 뇌로부터 해석되는
전기신호일 뿐이야...

서양 문명의 역사

아테네인은 유능한 소수 명망가에 의하 지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모든 공공 문제에 대한 전체 시민의 발언권을 보장하는 일이었다. - 제6장 그리스문명, p. 144

처음 읽는 독일 철학

칼 맑스

 맑스는 이제, 인간은 생존수단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분되며, 개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가에 따라 서로 구별되고, 개인의 본성은 그들의 생산을 결정하는 물질적 조건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발전시킵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들의 물질적 생산과 재생산의 활동이며 한 사회의 지배계급은 물질적 생산조건을 통제함으로써 사회 전체를 통제한다는 생각, 즉 유물론은 맑스(와 엥겔스)의 이 시기 연구를 통해서 비로소 정초됐던 것이죠. 이러한 유물론적 전환을 통해 그는, 청년 헤겔주의자들이 주요한 비판 대상으로 삼았던 종교는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서 민중으로 하여금 정치 권력의 진정한 토대를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아편의 기능을 한다고 봤습니다. 종교 비판은 정치 권력의 진정한 토대의 발견으로 나아가는 데 필수적이지만, 그 자체가 권력에 대한 비판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권력 비판은 현실의 경제적 관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실천적 비판을 필요로 한다는 자각은 그의 이후 작업을 일관되게 규정하는 유물론적 문제설정이었습니다. - p.22

 그에 따르면, 노동은 인간의 생명활동이고 자연을 가공하여 자신에게 적합한 것으로 가공하는 활동이자 자연과 신진대사를 하는 활동입니다. - p. 28

 정치학적 맥락에서 자본은 노동을 직접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에 대한 지배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합니다.
 그 런데 노동력 상품은 아무 때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수한 시기에 출현합니다. 노동하는 직접 생산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유리된 상황에서만, 그래서 생산수단과 결합하여 노동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시장에 내다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만 노동력이 상품으로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노동력 상품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직접 생산자들을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다시 생산수단과 결합시키기 위한 매개 장치입니다.
 맑스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직접 생산자의 분리라는 상황이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한 것이 아님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생산자로부터 생산수단을 폭력적으로 분리시켰던 피의 투쟁의 역사를 거쳐 역사적으로 발생한 사태이니다. 맑스는 그것을 '시초 축적'이라고 불렀스니다.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여성으로부터 그녀의 친숙한 환경을, 자유인들로부터 고동체를,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교류수단인 화폐를 폭력적으로 분리시키는 내전을 거쳐서 자연, 공동체, 그리고 각종의 생산수단들은 자본에 의해 독점적으로 장악되어 노동자와 대립하는 것으로 정립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시장에 내다파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갖지 못한 특수한 역사적 존재가 창출됩니다. 이것이 맑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력은 시장에 상품으로 등장하지요. 프롤레타리아의 생명 활동인 노동이 이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는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의 기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p. 30

 즉 노동력은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상품입니다. 노동력을 구매한 자본은, 노동력의 실현 과정인 노동 과정을 통제함으로써 노동력이 그것의 가치 (즉 그것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 이상의 가치를 생산하도록 노동자를 강제합니다. 그 강제의 방식으로 역사적으로 변화합니다. 노동의 절대시간을 늘리거나 노동 강도를 높이는 것 등이 그것이지요. 자본가에게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단순히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임금으로 지불한 것인 노동력의 상품가치 이상으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자본에 의해 강요되는 바에 따라,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의 재생산 시간인 필요노동시간 이상을 노동하게 되는데 이 시간이 바로 잉여노동시간입니다. 잉여노동시간에 생산되는 가치는 노동력을 구매한 산업자본가에게 모두 귀속됐다(착취)가 토지 자본(지대), 은행 자본(이자), 상업 자본과 산업 자본(이윤)에 분배됩니다. - p. 31

은행 제도와 주식회사 제도의 발전은 화폐의 소유자와 이용자를 분리시켜 자본주의 속에서 사적 소유가 지양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맑스는 그래서 주식회사를 사회주의로의 이행 형태, 자본의 사회주의라고 불렀습니다. - p. 35

장자

소요유편
1-1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은 곤이다. 곤의 크기는 몇천리나 되는 모른다. 그것이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은 붕새이다. 그 붕새의 등허리는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른다. 솟구쳐 날 때 그의 날개가 마치 하늘을 덮은 구름과 같았다. 이 새는 바닷물이 출렁일 때 (일어나는 바람을 타고) 남쪽 바다로 날아가고자 한다. 이 남쪽 바다는 천연으로 이루어진 큰 호수이다.
 
1-2 『제해』는 괴이한 일을 기록한 책이다. 『제해』의 말에 이르기를 “붕새가 남해로 날아갈 때 (두 날개로) 수면을 후려치니 물보라가 삼천 리나 치솟고 회오리바람처럼 휘돌아 구만리나 올라챈 뒤 여섯 달을 날아가서야 쉬게 된다”고 하셨다. 야생마와 같은 아지랑이와 날아다니는 먼지는 생물들이 숨결로 불어낸 것이다. 하늘의 짙푸름이 그의 진정한 빛깔인가? 아니면 멀어서 그 끝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인가? 붕새가 아래를 내려다볼 때에도 이와 같을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물이 두텁게 쌓이지 않으면 큰 배를 실을 힘이 없을 것이다. 이는 마치 대청의 오목한 곳에 물을 한 잔 부으면 지푸라기가 그의 배가 되고 여기에 술잔을 놓으면 바닥에 붙어버리는 것과 같으니, 물은 얕고 배는 크기 때문이다. 바람이 두텁게 쌓이지 않으면 대붕을 실을 힘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붕새가 구만리 높이 날아오르는 것은 구만 리 두께의 바람이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뒤라야 바람에 의지할 수 있으며 등에 짙푸른 하늘을 짊어지되 그것을 막을 자가 없는 뒤라야 비로소 남녘 바다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1-3 말매미와 작은 비둘기가 그를 비웃어 말했다. “내가 훌쩍 날아 느릅나무, 박달나무로 솟구쳐오르되 때로 그에 이르지 못하고 땅에 떨어져버리기도 하는데 무엇 때문에 구만 리 높이 올라 남녘으로 가고자 하는가?” 푸른 풀 우거진 들로 나아가는 것은 세 끼 밥을 가지고 그날로 돌아와도 배가 그래도 든든하고, 백 리를 여행하는 사람은 밤새워 방아 찧어 식량을 마련하고 천릿길을 여행하려는 사람은 석 달의 식량을 마련해야 하나니, (말매미와 작은 비둘기) 이 두 벌레가 또 무엇을 알겠는가?
 
1-4소지小知는 대지大知를 모르며 수명이 짧은 것은 수명이 긴 것을 모르나니 무엇을 가지고 그러함을 알겠는가? 조균朝菌은 아침과 저녁을 모르며 쓰르라미는 봄과 가을을 모르나니 이것은 수명이 짧은 것이다. 초楚나라의 남쪽에 명령이라는 나무가 있으니 오백 세로써 봄을 삼고 오백 세로써 가을을 삼으며, 상고에 대춘이라는 남가 있으니 팔천 세로써 봄을 삼고 팔천 세로써 가을을 삼았다. 그러나 (겨우 칠백 세밖에 살지 못한) 팽조가 오늘날 오래 산 것으로 특별히 유명하여 뭇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하니 슬프지 않은가?

노자와 21세기 - 김용옥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한신대 학생들의 합창의 배경으로 저 멀리서 들려오는 화계사의 범종소리나 목탁소리가 같이 하모니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체험 속에서 성스럽게 살지라도 멀리서 울려 퍼지는 범종의 소리를 그 어느 누구도 불경스럽게 들은 적이 없다. - p. 45


 인 간이 감내하기 어려운, 신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고대사회의 모든 제식이 종교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종교 때문에 생겨나고, 사제와 비사제 간의 계급적 불평등이 생겨나고, 인간이 노예처럼 어떤 권위 앞에 복습되는 모든 모습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적 사유를 마비시키는 모든 기만적 행태가 종교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의 해방과 평등을 부르짖는 모든 종교의 슬러건의 이면에 반드시 종교라는 귄위조직에로의 인간의 복속이 있지 아니한 예를 우리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해방· 평등의 실천만으로는 근원적으로 종교라는 조직이 유지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종교가 뭐가 좋은가? 없는 것보다는 있어서 해악이 더 큰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 아닌가? 우리나라 신흥종교의 모든 형태가 "사기성"을 지니지 아니한 예를 본 적이 있는가? 카메라 조작으로 성령이 내리는 것을 사진으로 찍어대고, 연보돈으로 축제하여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탁명환선생을 살해 할 정도로 그 배면에는 확인되지 않은 의문사들이 비일비재하고, 항상 검찰도 두려워 손을 대기 꺼려하는 암막의 베일이 종교가 아닌가? 도대체 종교가 뭐가 좋은가? 어떻게 종교를 善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러한 나의 항변은 도무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무리 내가 이렇게 항변해도 종교는 인간세에서 없어질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니이체는 종교란 놈에게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이 종교란 놈의 주범인 神을 살해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900년에 生의 막을 내린 20세기의 예언자 니이체는 드높이 선포했다: "神은 죽었다." (God is Dead ! )

 그 런데 니이체는 헛지랄을 한 것이다. 도무지 죽일 수 없는 것을 죽인 것이다. 神은 결코 사살될 수가 없는 것이다. 니이체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20세기는 인류사상 가장 종교가 보편화되고 성행했으며, 인류사상 가장 많은 종교적 죄악이 저질러진 세기였다. 20세기는 인류사상 가장 많은 신흥종교들이 발생했으며, 20세기야말로 모든 神들의 그야말로 신나는 축제장이었던 것이다. 니이체의 신의 사망선고는 결국 니이체라는 개인의 서구문명에 대한 양심선언에 불과했던 것이다.

 - 중략 -

 종 교는 악이다. 그러고  종교는 근원적으로 인간에게서 제거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종교라는 악의 배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종교적 악은 엄청난 선의 가능성을 동반한다. 평소 때 할 수 없었던 희생을 가능케 하고, 개인의 욕망을 뛰어넘는 보편적 행위를 가능케 하며, 인간을 절망에서 구원하며, 죄의식을 씻어주고, 모든 인간을 사랑과 화합으로 인도한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월자의 믿음안에서 한 몸이 되며, 서로의 생명의 가능성을 극대화시켜주며, 아름다운 공동체생활을 가능케 하는 질서와 극기와 이념을 제공한다. 종교는 악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간세의 모든 악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인간세에 존속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악의 배면의 엄청난 선의 사능성, 그 에너지 때문인 것이다. - p. 48 ~ 51

공통체 - 안토니오 네그리

그런데 근대 공화주의에 대한 하나의 특수한 정의가 다른 것들을 물리쳤다. 소유의 지배와 사유재산권의 신성불가침성에 기반한, 따라서 재산 없는 사람들을 배제하거나 종속시키는 공화주의가 그것이다. 아베 시에예스에 따르면 재산 없는 사람들은 단순히 "제대로 보수를 받지 못하는 손과 빨려나간 영혼만을 가지고 있는 두 발 발린 도구들의 방대한 무리"일 뿐이다. 공화국이라는 개념과 소유의 지배 사이에 필연적이거나 본질적인 연결고리는 없다. 실제로 대안적 공화국 개념을 복원하거나 소유에 기반을 두지 않은 공화국에 대한 새로운 관념들을 창출하려는 것도 가능하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단지 소유 공화국이 지배적인 개념으로서 역사적으로 출현했다는 것이다. - p.38

이제 자유는 인간 실존의 부정적 힘이 되며, 인간 본성에 속하는 생래적 갈등들이 내전 상태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는 보루 역할을 한다. 개인의 무장이 그러한 자유를 보장하는 유일한 것이 된다. - p. 41

파페포포 레인보우

기억은 사라져도 아련한 느낌은 지울 수 없고,
사람은 떠나도 머문 자리에
그 향기는 오래도록 남는다.
- p. 59


엄마 뱃속에서 자라는 태아가
영양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하면,
태어난 뒤에 비만이 될 확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자궁에 있을 때 뱃속 환경의 영향을 받은 태아가
부족하게 먹을 것을 대비해
지방을 미리 저장하기 때문이다.
지금 그토록 무엇에 집착하는 것은
마음 깊이 숨어 있는 결핍 때문이다.
- p. 105


하루의 창을 열고 닫을 때마다
심호흡 한 번, 기지개 두 번,
그리고 나에게 거는 마법의 주문.
"할 수 있어!"

햇살이 강하다고 
나무가 자라기를 멈추지 않듯이
어둠이 짙다고
별이 빛나기를 게을리하지 않듯이
고단하고 막막한 나날 속에서도
열정은 맑고, 높고, 푸르게 살아 있다.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지 알 수 없지만
분명 온르과는 다를 거라는 믿음으로,
매일 주문을 걸며 새로운 하루에 발을 내딛는다.
- p. 178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나를 위해
누군가를 사랑하는걸까?
- p. 199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

아, 형제들!
이 창조주 '하나님' 이란 것은 실은 인간의 작품!
인간의 광기!
다른 모든 신들처럼.
- 3:7


그들은 자신의 비참한 상태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지.
하지만 그들은 감히 별과 같은 존재가 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한 거야.
그래서 그들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이렇게 생각했지.
"아, 지금과는 다른 존재,
행복한 존재로 살짝 바뀔 수 있는
'하늘의 길'이 있다면..."
그래서 그들은 비밀스러운 길이 존재하는 것처럼 상상해내고 
구원 받기 위해 마실 피를 상상해 냈던 거야! 
- 3:24


심지어 망상에 걸렸다가 회복기에 있는 사람이
다시 그 망상을 부드러운 눈길로 응시하고
한밤중에 살금살금 자신의 하나님이 묻힌 무덤으로 가더라도
짜라두짜는 화내지 않아.
그런 사람이 흘리는 눈물마저도 나에겐
병의 증상, 병 걸린 사람의 증상으로 보일 뿐이야.
- 3:27


형제들! 자네가 미덕을 가지고 있고
그 미덕이 진정 자네의 미덕이라면
그 미덕은 어떤 다른 사람의 미덕과도 같을 수 없어.

물론 자네는 그 미덕에 이름을 붙이고 그 미덕을  쓰다듬고
싶겠지. 그 미덕의 귀를 당겨 보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놀고 싶겠지.

하지만 봐!
이름을 붙이고 떠벌이는 건 인민과 어울려서
자네의 미덕에 이름을 붙이고 자네의 미덕을 지닌 채
<떼> 중의 하나가 되는 거야!

차라리 이렇게 말하도록!
"내 영혼을 괴롭히기도 하고 기쁘게도 하는 그것,
내 창자가 항상 배고파 원하는 그것.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이름도 없습니다."

자네 미덕은 너무나 고귀해서 이름 붙이기 힘든 것이야 돼.
꼭 이름을 이야기해야 된다면,
이렇게 더듬거리며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

"이게 제 방식의 선(善)이거든요. 저는 이걸 사랑합니다.
저는 이걸 좋아하지요. 저는 이 방식대로 선이 이루어지기를 원해요.

이것을 두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라고 하면 저는 싫어요.
이것을 두고 인간의 규범이라고 하거나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저는 싫어요.
저 세상으로 이끄는 이정표라고 해도 싫고
천국으로 이끄는 이정표라고 해도 싫어요.

제가 사랑하는 이것은 이 땅 냄새가 나는 미덕일 뿐이지요.
이 미덕에는 깊은 생각이 들어 있는 게 아니에요.
남들도 같이 할 만 한 지혜 따위는 더더욱 없지요.

이 미덕은 작은 새 같죠.
살다 보니까 제 집 처마 밑에 둥지를 틀었네요.
그래서 사랑하게 되었고 아끼게 되었을 뿐이죠.
아, 저기 보이죠? 이제 작은 황금색 알 위에 앉아 있군요!

이런 식으로 자네의 미덕을 더듬거리며 이야기해야 돼.
이런 식으로 자네의 미덕을 찬양해야 돼.
- 5:1 ~ 5:9


생각과 행동은 다른 거지.
행동과 행동의 이미지도 다른 거야.
이 셋 사이엔 인과 관계가 없어.
- 6:9

한때는 하나님을 떠받들었지.
그러고 나서는 인간을 떠받들었어.
지금은 폭도를 떠받들어.
- 7:5

산에서는 봉우리에서 봉우리로 건너뛰는 게 제일 빠르지.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다리가 엄청 길어야 돼.
아포리즘은 봉우리야.
아포리즘을 읽는 사람은 거인이어야 해.
- 7:7 



10. 전쟁과 전사(戰士)

나는 자네 가슴속에 깃들어 있는 증오와 시기를 알지.
자네는 증오와 시기를 초월할 정도로 위대하지는 않아.
그러니 자신이 가진 증오와 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자네의 위대한 점이 되도록.
- 10:3

빈 집 - 김주영

"태어난 고향이 어딘지, 친척들은 어디에 흩어져 살고 있는 것인지, 정말 그런 것 몰라. 내 이름이 배수진이란 것밖에는.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남에게 그런 것 묻지 않고 살았어. 내가 철부지 젖먹이일 적에 엄마가 남편한테 버림받고, 엄동설한에 날 들쳐업고 사시사철 지향 없이 떠돌며 살았지. 우리 엄마 죽을 때까지 몸으로 때우고 감당해야 할 일이라면, 도둑질하고 서방질 빼놓고는 안 해본 일이 없었어. 다라이에다 생선 몇 마리 얹고 이 마을 저 마을 넘나들며 생선장수도 했었고, 파출부살이는 보통 하는 일이었고, 삯바느질도 했었고, 농가에서 더부살이로 들어가 모심기, 고추 따기도 했었지. 그래서 우리 엄마 손등은 매화나무 등피같이 갈라터져서 험악했어. 내게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다면, 이름도 없는 산골 구석 남의 집 밭둑에서 칭얼거리며 뱀딸기나 질경이 뜯어먹으며 놀았던 기억밖에 없어. 내가 봐도 어머니는 숨이 끊어질 때까지 놀고먹는 일을 무서워했지. 만류를 해도 소용이 없었어. 돌아가시기 전까지 이 좁은 포구에서 일감을 찾아 헤매다녔어. 그게 우리 엄마야. 선창으로 나가 입항한 배에서 그물을 받아 생선을 따거나 그물 보수하는 일로 생계를 꾸려 나갔지. 그런 애옥살이를 견디는 중에 당신은 배를 쫄쫄 굶으면서 먹는 것만 생겼다 하면, 오지랖에 싸들고 와서 나를 먹이는데 거의 미쳐 있다시피 했지. 나느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그 써늘하게 식은 음식들을 목구멍이 미어터지도록 꾸역꾸역 우겨넣었지. 왠지 알어? 나에게는 그게 낙이었고 잘 놀고 있는 것이었고, 그것 외에는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지. 나는 어머니란 존재가 오직 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 살고 있는 사람으로만 알았으니까. 끼니를 거르거나 배가 조금만 고파도 먹을 걸 안 가져온다고 어머니 따귀도 때려봤어. 그 죗값 때문에 지금 내 몸뚱이가 이 꼴이 되고 말았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어머니는 당신이 배를 주리는 원수를 갚느라고 나를 그렇게 짐승처럼 먹여 키웠는지도 몰라. 내가 이런 비곗덩어리로 살게 되리라곤 어머니는 상상할 수도 없었겠지."
- p. 120

나는 갈팡질팡 방파제로 달려갔다. 그리고 방파제 끝에서 안성댁이 껴입었던 푸른색 재킷을 발견했다. 단정하게 접혀 있는 상태였다. 방파제 앞에 끝간데없이 펼쳐진 곳을 바다로 생각했다면, 신발을 벗어놓았을 텐데, 태양이 작열하는 뜨거운 사막으로 알았기에 껴입고 다녔던 재킷을 벗어놓고 떠난 것이었다. 이제 사막으로 떠난 수진이 언니처럼 바다 끝에 서있는 나 어진이 역시 온전히 혼자가 된 것이다.
- p. 333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 - 이외수

60
 내친 김에 교육도 엉덩이를 몇 개 걷어차주고 넘어가자. 대한민국은 현실적으로 교육의 본질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나라다. 어떤 면에서는 학문탐구인지 항문탐구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다.

68
반 드시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입술이 허옇게 부르트도록 공부를 해서 막상 대학에 들어가 보라. 대학은 거대한 허욕의 공동묘지. 지각이 있는 젊은이라면 대학이 단지 직장을 얻기 위해 놓여진 징검다리에 불과하다는사실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시 간은 불어터진 채로 널브러져 있지만 공부할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현실은 각박한데 미래는 불투명하다.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 하지만 앞으로 나가자니 천길 저력이요 뒤로 물러서자니 막다른 골목이다. 자꾸만 속았다는 생각이 치밀어 오른다.

106
 세상은 천박한 욕망의 전장이다.
 용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어른들에게 자신의 육체를 성적 노리개로 제공하는 여중생들. 외모지상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들을 시궁창으로 밀어넣고 있다. 오물을 깨끗이 씻어내고 제대로 활짝 피어날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은 무엇일까.
 친 구들끼리 술을 마시고 여중생을 강제로 납치해서 야산으로 끌고 가 집단강간하는 남고생들, 아무리 성욕을 주체하기 기 힘든 나이라지만 자신들의 행위가 천인공노할 범죄라는 사실을 모를 까닭이 없다. 무엇이 저 푸른 나이를 뿌리부터 병들게 하는 것일까.
 지 하철에서 주위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부둥켜안은 채 노골적인 애무를 즐기고 있는 대학생들. 요즘은 대학생들이 솔선수범해서 유치원생들과의 지각평준화에 총력을 경주하고 있다. 뇌를 절개해 보면 '취업', '섹스' 두 개의 단어만 선명하게 입력되어 있을 것 같다.

인생수업 - 법륜

한 할머니가 걱정이 있다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기도를 하는데, 소원성취가 안 될 것 같아요.”
 “무슨 기도를 하시는데요?”
 “우리 손녀딸이 고3이라
입시기도를 하거든요.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가요?”
 “우리 손녀딸이 교회에 다니거든요.”
 할머니는 열심히 관세음보살을 부르는데 손녀딸이 교회에 다니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도가 안 이뤄질 것 같다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관세음보살님이 보살님 같을까 봐요?”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이 고3짜리 아이가 교회에 다니는지 절에 다니는지
그런 거 따질까요? 따지면 관셈음보살이겠어요? 우리는 신앙을 하면서도 늘 자기 수준으로 믿고 자기 수준으로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끌어내립니다.
- p. 74

가 령 부인보고 남편에게 숙이라고 하면, "남편에게 문제가 있는데, 왜 저더러 숙이라고 하세요?" 합니다. 또 남편에게 부인에게 숙이라고 하면, "아내에게 문제가 있는데 왜 제가 숙여야 하나요?" 합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 상대는 그르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서로 옳다고 싸울 일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먼저 자기를 살피고 마음을 바꾸면, 서로 편안해지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 p. 126

세종문화회관 건물의 가치와 개축

"광화문 앞은 전통적으로 관아건축이 들어서는 곳으로 그 나름의 위상이 있어요. 점잖은 시아버지라면 두루마기도 입고 갓도 쓰고 그래야 되는 것처럼 이쪽 건물은 품위를 갖춰 정장을 해야 돼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갖춰야 할 것은 갖춰야지 날라리 베레모 같은 건축은 안 어울립니다.

건축은 어디든 그곳의 정서를 거울처럼 비추고 있는 겁니다. 코르비지에를 위시한 현대건축이 국제적으로 유행해서 아프리카 미국 남미 아시아 모두 두부모 자른듯 똑같은 건물일색으로 획일화 되었지만 거기에 자기특유의 칼러가 없으면 멋이 붙질 않아요. 같은 서울이라도 동대문 밖에서는 사람을 찾을 때 '여보게에-- 있나아---' 하는 어조가 있잖아요. 사투리 없이 표준말만 있어도 매력이 없습니다. 경상도 전라도엔 감나무가 많듯 그런게 끼어야 정서가 살고 생활에 멋이 붙어요.

난 서양건축을 배웠지만 지역칼라도 정서도 없으면서 모던, 모던 하는 데 질렸습니다. 후기 모더니즘이 제창된 것도 옛 원칙의 소중함을 아주 잃어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유럽 중세건축의 돔은 지금 용도가 없는 공간이긴 해도 돔을 만들어 넣는 현대 서양건축이 나옵니다. 우리도 계승할 건축적 자산이 많습니다. 난 그걸 열심히 연구합니다. 제가 설계한 건물엔 완자무늬, 격자무늬, 추녀, 기둥, 창문 같은 고건축에서 따온 것들이 들어갑니다. 한국은 아직도 근대건축이 기승부리는 국적없는 건축이고 건축의 식민지 같아요."



"[김유경의 문화기행 '서울, 북촌에서']<32> 건축가 엄덕문과 세종문화회관, 광화문 ②", 김유경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건축가들이 건물을 설계하면서 과연 이 건물이 누구를 위한 건물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것은 당연하다. 건축가는 의사들처럼 엄숙하게 선서를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건축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건축가는 스스로에게, 남들에게 이야기하곤 한다. 여기서 인간은 자본의 소유 여부나 사회적 지위의 고하에 의해 달리 규정되지 않는다. 건물 설계를 의뢰한 사람뿐 아니라 그 공터에서 공을 따라다니던 꼬마도 당연히 여기 포함된다. 좌판을 펴고 행상을 하던 아주머니도 포함된다. 많은 경우 건축가들의 아이디어와 노력은 자본의 배타성에 의하여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지니가는 행인이 잠시 앉아 있을 공간은 필요 없고 한 치라도 더 많은 면적을 임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의 언제나이기게 되어 있다. 공공 영역의 할애가 오히려 임대료를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임대 면적이 무작정 넓어야 한다는 절대적인 자본의 논리에 의해 압도당한다. 그래도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살펴보면 건축가의입장을 보여주는 건물을 곳곳에 찾아볼 수 있다. 


서현. 『건축, 음악처럼 듣고 미술처럼 보다』 「건물은 누구를 위해 만드나」. 2005, p. 202.

철학용어사전 - 오가와 히토시

 니체가 기독교를 비판한 이유는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스스로 규정하듯이 약한 사람을 위로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자신이 약하다는 점을 긍저하게 만들고, 저제상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며 사람들을 구슬린다. 그 때문에 기독교는 구원의 주체인 신의 존재를 창조했다고 보았다. 이로써 인간은 자신의 약함을 긍정하고 신이라는 존재에 모든 것을 맡겨 버린다. 니체는 이 점을 비판했다. 기독교적 사상을 따른다면 인간이 노예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니체는 기독교를 '노예도덕'이라고 부르며 비난했다. 그리고 하루빨리 그 점을 깨닫고 노예도덕에서 벗어나 홀로 강인하게 살아 나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것이 니체의 사상이다. 『철학용어사전』 「초인」
- p. 237

2014년 9월 22일 월요일

교양으로 읽는 건축 - 임석재

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가우디가 되기를 꿈꾸며 건축학과에 진학한다. 개인의 능력이 미치지 못해 가우디가 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어른들이 자식 세대들을 위해 조성한 환경이 가우디를 꿈꾸는 것 자체가 완전히 불가능한 상태라서 그 꿈을 처절하게 포기하고 부동산 투기에 휩쓸려 평생을 힘들게 헐떡이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이들 꿈나무들에게 무어라 말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이 세상의 건축이란 것에는 가우디 같은 작품 세계와 우리나라 같은 부동산 투기의 두 종류가 있단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우디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단다. 그런 걸 꿈꾸다가는 평생 쪽박 차고 빌어먹는 인생이 된단다. 가우디는 그저 가끔 생각날 때 책이나 뒤적여보고 더 여유가 되면 바르셀로나에 가서 한 번 보고 오면 되지 않겠니? 인삼을 일본에 심으면 도라지가 되고, 귤을 북쪽 지방에 심으면 탱자가 되는데, 가우디도 우리나라에 오면 별 수 없을 거란다. 너는 우리나라에 태어났으니 부동산 투기나 해서 돈 많이 벌어 명품이나 쓰면서 사는 게 최고란다." 이렇게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이것을 감추면서 "가우디만이 건축의 전부이며, 모두가 가우디처럼 되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다고 현실만이 유일한 살길이며 현실에 휩쓸려 살라고 인도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이다. 현실을 알려주고 가우디 얘기도 해주되 현실에 대해 비판적 대안을 생각할 힘을 길러주는 것이 건축에 대해 올바른 정의를 내리고 소개를 해주는 일일 것이다. 가우디를 꿈꾸는 일이 금기사항처럼 아예 생각도 안 되는 것으로 내몰려서는 안 된다. 왜 꿈꾸면 안 되는 상태가 되었는지, 그것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대응할 것인지, 그 대안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어야 한다. 한 단계 더 바라자면 다음 세대들이 이런 일그러진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 p. 23




예술가’와 ‘사장님’ 사이에서 - 친절한 아저씨와 문명비평가

건 축은 거창한 것이절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축가를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로 보면서 경외감을 부여하지만 이것은 큰 오해이다. 진정한 건축가는 마음씨 좋은 친절한 아저씨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관건은사람들이 살아가는 조형 환경과 방식에 대한 나만의 제안과 해석의 문제인 것이다. 좋은 건축이란 이런소질을 잘 구현해서 살기 편리하고 편안하고 아늑한 집과 건물을 만드는 것이면 사실 족하다.

좀 더 큰 차원에서보자면 건축적 관점에서 자신이 사는 문명의 성격과 장단점을 정의해서 이상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즉건축을 통해 문명을 논하고 이끌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능력을 가진 건축가는 서구 선진국에서도매우 드물며 우리나라에서는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이런 능력은 흔히 학자에게도 똑같이 요구되는 것으로생각하기 쉽지만 종류만 다를 뿐 건축가들에게도 똑같이 요구된다. 선진국과 우리나라를 구분하는 차이 가운데에는이런 건축가의 유무도 들어있다. 선진국이란 다름 아니라 문명 차원에서 건축을 논하고 거꾸로 건축을 통해문명을 이끌어가는 능력을 갖춘 건축가가 있는 나라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후진국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신생독립국 미국이 유럽 선진국과 어깨를 견주며 이들을 추월하기 시작한 20세기 전반부에 건축을 통해 미국적 근대성, 나아가 미국이라는 나라전체의 정체성을 정의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광활한 대륙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린 건축을 미국의 근대적정체성으로 제시했으며, 이런 내용을 ‘교외이상’이라는 문명 차원의 가치로 환원해냈다. 한 마디로 교외에서 미래 이상을찾겠다는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이상’이라 하면 첨단기술과 미래 이상을 찾겠다는 것이 보통이다. 더욱이첨단 기술국가 미국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라이트는 의외로 이런 첨단 기술국가미국의 정체성과 미래 이상을 교외, 즉 자연에서 찾은 것이었다. 이개념은 지금까지도 맨해튼의 초고층 건물과 함께 미국 사회, 미국인의 국가관, 가장 미국다운 특징 등을 구성하는 양대 축으로 남아있다.

우리의 현실은 이상과완전히 반대로 가고 있다. 건축주 개개인의 요구를 세밀히 보살펴주는 정성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나 신도시같은 곳에서는 비현실적인 생떼에 해당된다. 이를테면 자동차 한 대 사놓고 엔지니어더러 집에 와서 이것도봐주고 저것도 고쳐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아져버렸다. 원래 이런 일을 해야 되는 건축가들조차도 ‘단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있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도 매우 중요한 가치이자 하나의 능력인데 처음부터 독립적 가치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그런 능력을 배양할 기회조차 갖기 못했다.

 문명 차원의 논의는 더 요원핟. 20세기 100년을 식민지배와 압축적 근대화라는 힘든 시기를 겪으며이전 사회의 한국적 정체성은 갈래갈래 찢겨나갔음에도 20세기에 맞는 한국만의 건축모델이나 주거방식 등에대한 고민을 하는 건축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패거리 이루어 소주잔이나 기울이면서 S대 나왔네 H대 나왔네 하면서 싸움질이나 하는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치부하며 살아왔다. WTO에서 FTA를 거치면서 극단성은더 심해졌다. 냉정하게 보아서 70퍼센트의 돈 논리, 20퍼센트의 기술 논리, 9퍼센트의 장식 논리가 지금 우리의 건축을지배하고 있다. 나머지 1퍼센트 내에서 예술적 작품성도 확보해야되고 살기 편안한 인간성도 찾아야 된다. 처음부터 떡 나누기가 잘못된 것이다.

 두 번의 위기상황을 거치면서 이렇게 되었다. 서양에서는 두 번의 큰 변화를 거치며 건축가라는 직업, 더 근본적으로건축의 기본속성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르네상스 때로 이때부터 전문적인 직업 예술가가 등장하면서집주인의 요구보다 건축가의 예술성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두 번재는 산업혁명 이후로 기술과 자본이 건축가의예술성마저 앞지르기 시작했다. 건축가의 예술성에 기술과 자본의 논리를 두껍게 덧칠하면서 집주인의 자잘한고민과 소박한 바람 따위는 두 겹의 큰 장벽 뒤에 너무나 하잘 것 없이 묻혀버렸다. 우리나라에서는 개화기이후 일제강점기와 압축 근대화기를 거치면서 짤은 시간에 이 둘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대혼란이었다. 무엇이 올바른 답인지 알지 못하는 사이 이런 혼란과 불안을 잠재워줄 묘약으로 압축 근대화와 부동산 투기가 등장했다. 우리도 후딱 서양처럼 잘살게 만들어주고 돈도 벌게 해준다는데 불안이고 뭐고 문제될 것이 없었다. ‘돈은 안 되지만 개개인의 감성과 고민을 보듬어주는 섬세한 집’ 대‘난폭하긴 하지만 돈이 되는 집’ 사이의 선택의 문제였고, 우리 사회는 어쩔 수 없이 후자를 택했다. 사람들의 본성이란 어쩔수 없는 것이어서 이런 선택의 기로에 몰리면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상황을 이런 기로로 몰고 가지않게 만들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요즘은 솔직히 얘기해서 앞에 열거한 소질따위는 사실 점점 쓸모없게 되어가고 있다. 설계사무소가 대형화되면서 섬세한 소질에 기초한 전문성보다는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 대부분을 차지해가고 있다. 관건은 말썽 안 피우고 로봇이나 기계부품처럼그려내라는 일을 곧이곧대로 핸기만 하면 되는 쪽으로 굳어가고 있다. 그려낸다는 일 자체가 특별한 소질이나잔문성이 필요 없는 단순반복 작업이다.좀 심하게 말하자면 석 달만 학원에 다니면 굳이 건축 전공자가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성실함과 끈기 같은 덕목이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일반적인 직업윤리이지 굳이 건축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P. 46 ~ 51

에로스트라트 - 사르트르

그녀는 어색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걷기 시작했다. 알몸으로 걷는 것 이상으로 여자들을 더 어색하게 하는 것은 없다. 여자들은 뒤꿈치를 땅에 납작하게 대본 일이 없다. 창녀는 등을 rn부리고 팔을 늘어뜨렸다. 나는 몹시 행복했다. 안락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서, 목까지 오는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장갑도 끼고 있었다. 그 성숙한 여인은 내 명령대로 완전히 알몸이 되어 내 주위를 왔다 갔다 했다. - p. 93

『논어』 「학이」

人不知而不慍이면 不亦君子乎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

내 사진에 힘을 주는 101가지

좋은 사진은 '건지는 것'이 아니라 '찍는 것'이다.
사진 찍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운이라는 주장이 있다. 확실히 사진은 로또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이제 막 사진을 시작한 생활사진가도 운이 좋으면 멋진 사진을 찍을 확률이 있다. 로또 1등에 당첨될 확률이 낮지만 누구에게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초보 사진가가 좋은 사진을 계속해서 찍을 확률은 0에 가깝다. 한 번 1등에 당첨된 사람이 계속해서 1등에 당첨될 확률은 0에 가깝다. 실력 있는 사진가는 1등은 아니라고 해도 2, 3등은 계속 당첨될 가능성이 초보보다 훨씬 높다. 사진은 '건지는 것'이 아니라 '찍는 것'이다. - p. 10



"당신의 사진이 불만스럽다면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 버트 카파를 비롯한 많은 사진의 대가들이 한결같이 얘기하는 사진의 원칙이다. 초보자들뿐 아니라 몇 년씩 사진을 찍은 사람들도 인물을 찍을 때는 가까이 가지 못한다. 겁을 내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데 가까이 가도 될까, 나(카메라)를 두려워하지 않을까" 걱정하다 보니 아픙로 나서는 것이 힘들다. 두 번째 이유는 전체를 담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다. 어차피 사진은 전체를 보여 주지 못한다. 가까이 갈수록 필요한 것이 잘 보이고 크게 보인다. - p. 



어떤 카메라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카 메라 역사의 초기엔 좋은 카메라와 나쁜 카메라, 좋은 렌즈와 나쁜 렌즈의 차이가 심했다. 지금은 그 차이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브레송이 라이카 카메라를 쓴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자신의 사진 알 촬영 연도, 장소 외에 카메라의 종류를 밝히지는 않았다. 헤밍웨이나 셰익스피어가 무슨 펜, 무슨 만년필로 글을 썼는지 밝히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 p. 19


구도는 껍데기일 뿐이다.
사 진을 배우는 단계라면 구도에 대해선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진은 내용르 보여 주는 것인데 틀에 집착하면 막상 그릇에 뭘 담아야 하는지 잊어버리게 된다. 셔터를 누르는 것은 순간이다. 그 순간에 그릇의 모양에 대해 생각하면 내용이 달아나 버린다. - p. 51 


중요한 것은 구성이다.
당신이 찍으려고 하는 것을 프레임 속에 배치하는 것을 구성이라 부른다. 찍고 싶은 것만 담는 것이 중요하다. - p. 52



좌우로 한 걸음, 앞뒤로 한 걸음, 앉고 엎드리면 사진이 바뀐다.
누 구나 본능적으로 사진을 찍을 때 좋은 자리를 찾아간다. 그러나 한번 자리를 정하면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이때 과감하게 자신의 자리에 회의를 품고 변화를 시도해야 한다. 사람은 성장하면 일생 같은 눈높이로 사진을 바라본다. 이 높이는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집이나 삼실의 가구, 집기, 용품들이 모두 눈높이에 맞게 구성되어 있다. 길거리 풍경도 모두 선 자세의 눈높이에 익숙한 것들이다. 앉아서 찍으면 세상이 달라지고 보지 못하던 것들이 보인다. 허리나 무릎을 구ㅜ리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서서 찍으면 사진에 변화가 없다.
 한 번 누워보기도 하고 앉아보기도 했으면 다시 일어서라. 실험을 했으면 보편성을 찾아 다시 돌아올 줄도 알아야 한다. - p. 65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모두 잊어도 된다. 단 이것만은 기억하라. 가장 좋은 사진은 재미있는 사진이다.
사진을 찍는 본인에게, 사진ㅇ르 보는 다른 이들에게 웃음을 준다면 그보다 더 좋은 사진은 없다. - p. 101

싸우는 인문학

눈은 내리고, 저녁은 매일매일 오늘이 너의 마지막이어도 좋은가 물으며 할 일을 재촉하지만, 눈은 쌓이고 세상은 속절없이 계속 치워야 하는 백색의 장애로 가득하다.
- p. 7

처음 읽는 서양 철학사

"지시하지 않으면서도 지도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모든 일을 한다."
「루소」 p. 225

세계 철학사 - 옮긴이의 말

'철학'을 뜻하는 서양 언어, 예컨대 독일어 'Philosophie'나 영어 'philosophy'가 어원상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일견 자명하게 여겨지는 이 어원적 정의는 우리의 생각을 자극하는 여러 가지 물음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지혜'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지혜를 향한 '사랑'이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이 사랑은 다른 대상에 대한 애착이나 추구 내지 신봉 등과 다른 것인가? 만약 다르다면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가? 더 나아가 지혜에 대한 사랑은 그것을 품은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남기는가? 그런데 이런 유의 모든 물음과 더불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도 철학이 '지혜 자체'나 '지혜의 소유'가 아니라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정의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에 대한'은 분명 일정한 '거리'를 함축하고 있다. 이 거리가 뜻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며, 이는 어디서 연원하는 것인가?

 철학은 '경이' 내지 '경탄'에서 시작된다는 말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여기서 경이란 평소 당연하게 여겨 왔던 것을 전혀 당연하지 않은 사태로 경험한는 것을 일컫는다. 예컨대 우리가 태어나 살아가는 친숙한 이 세계에 대해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이런 물음을 품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왜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왜 없지 않고 있는 것인가?" "세상을 이루는 이 모든 것은 어떻게 해서 있게 된 것인가?" "도대체 있음과 없음이란 무엇인가?" "이 세계는 정말로 있는 것인가?" 더 나아가 "이 세계 안의 나, 이런 의문을 품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와 더불어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이 사람과 저 사람, 아니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모든 물음-그리고 이와 관련된 무수한 물음-은 당연히 해답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 해답을 신화와 같은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니라 논증의 방식에 의해 제시하려 할 때, 다시 말해 정의를 제안하고 주장을 제시하며 확증과 반박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추구할 때 철학은 시작된다.

 경탄과 물음 그리고 모색의 결실인 이 해답들은 앞서 말한 '지혜'와 연관이 있다. '지혜'란 아마도 궁극적이고 근복적인 해답 혹은 최고 형태의 해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인간을 포함한-전체로서의 세계란 인간에게 남김없이 해명되기는커녕 표상조차 불가능한 대상이다. 따라서 궁극적 해답으로서의 '지혜'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계속적이고 새로운 추구로 이 이상에 접근하려 애쓸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의 사유 작업, 달리 말해 철학이란 결코 '지혜 자체'나 '지혜의 소유'가 아니라 '지혜에 대한 사랑'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에 대한'이 함축하는 거리는 인간적 한계의 자각을 표현한다.


 물 론 철학은 사랑이기에 이 거리에 대한 자각에 머물지 않는다. 철학은 이 거리에 대한 자각에 머물지 않는다. 철학은 이 거리를 좁히려는 부단한 운동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철학은 그 비궁극성 내지 잠정성으로 인해 역동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릭 운동의 성격을 갖는 모든 것이 시간 내에서 전개되듯, 철학이란 사랑도 시간 내에서, 달리 말해 역사 속에서 전개된다. 이 역사는 물론 여러 층위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립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개별 사상가나 특정 지역, 특정 시기의 철학적 조류 혹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인류의 모든 철학적 노력을 고찰하려 할 때, 그 어떤 운동 내지 역사를 확인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요아힘 슈퇴리히가 말하듯- 철학에 대한 관심과 탐구는 철학사에 대한 이해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게 된다.

 철학사라는 이 독특한 사랑의 역사에는 '원칙적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인류가 가담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 운동과정에 대한 '서술'로서의 철학사에는 -지금까지 지상에 존재했던 모든 인간의 수와 비교할 때- 극소수의 인간들만이 등장한다. 철학자 혹은 사상가라 불리는 이들은 사유의 독창성과 철저함, 일관성이란 점에서 그 어떤 전범을 보인 사람들이며 그런 이유에서 기록과 전승의 가치를 부여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철학사 서술의 목표는 이러한 인물들의 사유를 소개하고, 설명함으로써 철학의 실례를 보여 주고, 더 나아가 독자 스스로 철학하는 것을 배우게 하는 데 있다.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가 추구하는 목표도 다르지 않다. 이 책은 '지혜에 대한 사랑'의 여러 가지 역사적 양태를 소개한다. 그리고 독자 스스로가 자신의 구체적 삶과 연관된 사랑법을 터득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이때 저자는 난해하기만 한 사상 모델들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하는 동시에 그러한 사상 모델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지 않으려 애쓴다. 일견 상충하는 이 두 가지 요건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데 저자가 어느 정도나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평가가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에 걸쳐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이 책이 거둔 성공, 독작들의 열렬한 호응은 이 책이 저자의 당초 목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음을 어느 정도 입증해 준다.

 철학에 전문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에서 불충분한 점도 발견할 것이며 다음과 같이 불만을 표출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의 철학을 고대에 국한해서 다루는 것은 '세계 철학사'란 이름에 값하지 못하는 서술태도가 아닌가? 또한 현대 프랑스 사상을 단 몇 쪽으로 요약해 버리고, 아도르노와 하버마스를 마르크스주의에 포함시켜 간단히 논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책 역시 '지혜에 대한 사랑'이 낳은 한 가지 결과물로 보기로 하자. 모든 사랑은 거리의 소멸, 이른바 완성을 원하지만, 거리는 사랑의 성립 조건이라는 것-이 바로 사랑의 역설이다. 그리고 이 역설은 모든 사랑이 불완전성의 운명을 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앞서 말했듯, 철학사에 등장하는 사상가들은 '지혜에 대한 사랑'을 완성시킨 사람들이 아니라-사랑의 탁월한 사례를 보여 준 사람들이다. 슈퇴리히의 책 역시 하나의 사례이며, 아마 철학사로서는 출중함이란 이름에 값하는 사례일 것이다.

 『세계 철학사』 옮긴이 '박민수'의 말

   - 문정영


날이 선 칼은 늘 시퍼렇게 몸 다듬는다
불에 덴 자국 푸른 물에 담가서 시퍼런 멍 자국을 만든다
천 번 두드려 날카로워진 칼은

제 몸 아파 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몸 함부로 벨까 두려워서 운다

새해 첫 기적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날마다 하늘이 열리나니

날마다 하늘이 열리나니

                                                 - 이외수

팔이 안으로만 굽는다 하여
어찌 등 뒤에 있는 그대를 껴안을 수 없으랴
내 한 몸 돌아서면 충분한 것을

운전을 하며

운전을 하며

                     - 원태연

비가 오는 줄 알았어
와이퍼를 켰지
와이퍼 고무가 다 된줄 알았어
여전히 창밖이 뿌옇지
워셔액을 뿌렸어
그래도 차장은 닦이지 않았지
차장은 처음부터 닦이지 않았었지
...........
비가 오는 줄 알았어

어느 날의 커피

어느 날의 커피

                              - 이해인

어느 날 혼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허무해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눈물이 쏟아지는데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사람이 없다.

주위엔 항상 친구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날 이런 마음을 들어줄 사람을 생각하니
수첩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
읽어 내려가 보아도 모두가 아니었다.

혼자 바람맞고 사는 세상.
거리를 걷다 가슴을 삭히고
마시는 뜨거운 한 잔의 커피.

아, 삶이란 때론 이렇게 외롭구나..

인연

인연

    - 정채봉

나는 없어져도 좋다
너는 행복하여라

없어진 것도 아닌
행복한 것도 아닌
너와 나는 다시 약속한다

나는 없어져도 좋다
너는 행복하여라


잠자리는 생각 중

잠자리는 생각 중 

                                -설용수


잠자리 한 마리
바위에 앉아

꼬리
바짝 치켜 올리고

바위를 들까?
지구를 들까?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 이정하                               
 
낮은 곳에 있고 싶었다.
낮은 곳이라면 지상의
그 어디라도 좋다.
찰랑찰랑 물처럼 고여들 네 사랑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한방울도 헛되이
새어나가지 않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 내가 
낮은 곳에 있겠다는 건
너를 위해 나를
온전히 비우겠다는 뜻이다.
나의 존재마저 너에게
흠뻑 주고 싶다는 뜻이다.
잠겨 죽어도 좋으니
너는
물처럼 내게 밀려오라.

내력

내력

     - 최승자


이제 그대의 오랜 내력에 대해 이야기하라.
머릿채 휘두르는 실의의 밤바다 위에서
천 밤을 떠도는 의식의 별.
그대의 비인 뼈 속에 몸져 누운 어둠에 대해
끝내 쿨럭이며 돋아나는 희한과
무엇이 폐벽을 뚫고 웅웅대는가를.

닿을 길 없이 무수히 떠나는 그림자를 좇아
한 마리 미친 말을 타고 달리는 그대
그대 의식의 문 뒤에서 숨어 우는 자유와
달빛에도 부끄러운 생채기마저 이야기하라.

긴긴 뼈앓이하는 밤바다에서
피묻은 부리로 상징을 물고 돌아오는 백조
감성의 늪에서 부끄러운 울음우는
짐승에 대해 다시금 이야기하라.

희망

희망

     - 황인숙

어제가 좋았다.
오늘도 어제가 좋았다.
어제가 좋았다, 매일
내일도 어제가 좋을 것이다.

버려진다는 것


버려진다는 것

                         - 권정우

 소년원 담장 옆에
깨진 소주병
소주병도 버려지니
아무한테나 날을 세우는구나

스며드는 것

스며드는 것 

                    -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뭘 하던 오가는 돈 문화가 참 이해가 안 가네.
사람이 죽으면 죽었다고 돈. 
결혼하면 결혼한다고 돈. 
애기 돌 잔치하면 돌 잔치한다고 돈. 

그냥 안 주고, 안 받으면 되잖아.
결혼식, 장례식, 돌 잔치 간소하게 하면 되잖아.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된 돈.

"그 놈의 돈, 돈, 돈" 소리가 안 나오게 악착같이 번다는 사람들.
과연 얼마나 벌어야 "돈" 소리가 안 나올까?

수명

람들은 자기가 다 평균 수명만큼 살 거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오늘 저녁 퇴근하다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 것 같다.

연습

림을 잘 그리려면 연습을, 노래를 잘 하려면 연습을 하듯이 생각도 연습이 필요하다.

양과 질

수하듯 매일 한 권을 책을 읽는 것보다,
1년에 걸쳐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사색하며 읽는 것이 훨씬 가치있다.

보이는 것

모는 사람으로 하여금 첫인상이라는 선입견을 갖게 한다.
그래서 사람을 볼 때 외모는 차치해두려 한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안 볼 수가 없다.
눈을 멀게 하고 싶다.

쓰레기장

색없는 독서는 쓰레기에 불과하다.
내 머리 속은 쓰레기장이 되었다.

반성

'철학함'이 아니라 '철학'이라는 겉멋이 들고 있다. 반성하자.

한계

각을 정리하기 위해서 글을 써놓기도 하지만, 되려 머리 속에서 정리된 것들이 글로는 표현되지 않기도 한다. 글은 내 생각을 확장시켜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한계 짓기도 한다.

창조적

간은 항상 창조적이지 않나?
항상, 지금 이 순간도, 나는 내 '현재'를 창조해나가고 있는 거잖아.

친한 친구

'친한 친구'의 기준이 뭘까? 비밀을 공유하고, 서로 막 대하면 그게 친한 친구일까?

카톡

중학생 때만 해도 문자니 메신저니 하루 종일 해도 전혀 질리지가 않았는데,
이제는 카톡 몇 개만 주고 받아도 질린다.

이상형

일 하다 든 생각. 
누군가가 내 이상형이었던 적은 많다. 
그런데 내가 누구의 이상형이었던 적은 한 번이라도 있을까?

버리기

애초에 없던 것을 욕심내지 않기는 쉬우나, 이미 가진 것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완벽함이란?

완 벽하지 않은 것이 '완벽함'을 알 수 있을까. 완벽함을 100이라고 했을 때, 완벽하지 않은 것은 군데군데 빈 공간을 제하고 합해보니 60이라는 수치가 나왔다. 그렇다면 완벽하지 않은 무엇은 나머지 40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 40이라는 수치를 안다고 하면 그 40이라는 수치가 완벽함을 이루는 데 모자라는 부분인 것을 알 수 있을까? 혹은 빈 부분은 있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완벽한데 완벽하지 못 하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 하는 것일까?

집단


집단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은 곧 집단을 이루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이 구성하는 집단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가정, 회사, 국가 등 인간은 집단에 속해있다. 부모가 버린 자식조차 집단에 속한다. 그 아이는 고아원에 속하기도 하고, 고아들끼리 모여 집단을 이루기도 한다.  

 집단은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집단의 이름으로 어떠한 행위도 정당화시킨다. 이것은 집단이 커지면 커질 수록 더 다양한 행위와 많은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그것이 옳든, 그르든 중요하지 않다. '집단이 행한 것이므로 정당한' 것이 된다. 행동과 생각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쓰러진 행인을 돕는다'라는 행위는 곧 그 사람의 가치관을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집단의 행위 정당화는 곧 개인에 대한 집단의 가치관 세뇌로 이어진다.

 집단은 인간을 맹목적으로 만든다. 이것은 주위에서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애국심, 효 사상, 충성심 등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한 명 한 명, 모두 다르며 같을 수가 없다. 하지만 집단은 통제를 위해 모든 사람이 같은 행동, 같은 생각을 하기 원한다. 

 집단은 실체가 없다. 집단에 속한 인간들은 마치 톱니바퀴처럼 기계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집단의 목적이 무엇인지, 설정된 목적이 왜 그 목적이어야 하는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다. 개인은 그저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 부품은 망가지면 교체하면 그만이다. 

 집단은 소멸해야한다. 집단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들며, 생각하지 못 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인간이 존재하는 한 집단은 사라질 수 없다. 그러므로 집단이 없어지기 위해서는 존재 이유인 인간이 사라져야 한다.

두꺼비






두꺼비

                              박성우
아버지는 두마리의 두꺼비를 키우셨다

해 가 말끔하게 떨어진 후에야 퇴근하셨던 아버지는 두꺼비부터 씻겨주고 늦은 식사를 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닌 아버지가 녀석에게만 관심을 주는것 같아 나는 녀석을 시샘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녀석을 껴앉고 주무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어 살짝 만져 보았다 그런데 녀석이 독을 뿜어대는 통에 내 양 눈이 한동안 충혈되어야 했다. 아버지, 저는 두꺼비가 싫어요.

아버지는 이윽고 식구들에게 두꺼비를 보여주는 것조차 꺼리셨다 칠순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날이 새기전에 막일판으로 나가셨는데 그때마다 잠들어 있던 녀석을 깨워 자전거 손잡이에 올려놓고 페달을 밟았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다오.

아버지는 지난 겨울, 두꺼비집을 지으셨다 두꺼비와 아버지는 그 집에서 긴 겨울잠에 들어갔다 봄이 지났으나 잔디만 깨어났다.

내 아버지 양 손엔 우둘투둘 두꺼비가 살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