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많은 학생들이 가우디가 되기를 꿈꾸며 건축학과에
진학한다. 개인의 능력이 미치지 못해 가우디가 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어른들이 자식 세대들을 위해 조성한
환경이 가우디를 꿈꾸는 것 자체가 완전히 불가능한 상태라서 그 꿈을 처절하게 포기하고 부동산 투기에 휩쓸려 평생을 힘들게 헐떡이며
살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이들 꿈나무들에게 무어라 말해주어야 한단 말인가. "이 세상의 건축이란 것에는 가우디 같은 작품
세계와 우리나라 같은 부동산 투기의 두 종류가 있단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우디는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단다. 그런 걸 꿈꾸다가는 평생
쪽박 차고 빌어먹는 인생이 된단다. 가우디는 그저 가끔 생각날 때 책이나 뒤적여보고 더 여유가 되면 바르셀로나에 가서 한 번
보고 오면 되지 않겠니? 인삼을 일본에 심으면 도라지가 되고, 귤을 북쪽 지방에 심으면 탱자가 되는데, 가우디도 우리나라에 오면 별
수 없을 거란다. 너는 우리나라에 태어났으니 부동산 투기나 해서 돈 많이 벌어 명품이나 쓰면서 사는 게 최고란다." 이렇게
말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는 것은 꼭
필요하다. 이것을 감추면서 "가우디만이 건축의 전부이며, 모두가 가우디처럼 되어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렇다고 현실만이 유일한 살길이며 현실에 휩쓸려 살라고 인도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이다. 현실을 알려주고 가우디 얘기도 해주되
현실에 대해 비판적 대안을 생각할 힘을 길러주는 것이 건축에 대해 올바른 정의를 내리고 소개를 해주는 일일 것이다. 가우디를
꿈꾸는 일이 금기사항처럼 아예 생각도 안 되는 것으로 내몰려서는 안 된다. 왜 꿈꾸면 안 되는 상태가 되었는지, 그것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대응할 것인지, 그 대안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힘을 키워주어야 한다. 한 단계 더 바라자면
다음 세대들이 이런 일그러진 현실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 p. 23
‘예술가’와 ‘사장님’ 사이에서 - 친절한 아저씨와 문명비평가
건 축은 거창한 것이절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축가를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로 보면서 경외감을 부여하지만 이것은 큰 오해이다. 진정한 건축가는 마음씨 좋은 친절한 아저씨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관건은사람들이 살아가는 조형 환경과 방식에 대한 나만의 제안과 해석의 문제인 것이다. 좋은 건축이란 이런소질을 잘 구현해서 살기 편리하고 편안하고 아늑한 집과 건물을 만드는 것이면 사실 족하다.
좀 더 큰 차원에서보자면 건축적 관점에서 자신이 사는 문명의 성격과 장단점을 정의해서 이상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즉건축을 통해 문명을 논하고 이끌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능력을 가진 건축가는 서구 선진국에서도매우 드물며 우리나라에서는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이런 능력은 흔히 학자에게도 똑같이 요구되는 것으로생각하기 쉽지만 종류만 다를 뿐 건축가들에게도 똑같이 요구된다. 선진국과 우리나라를 구분하는 차이 가운데에는이런 건축가의 유무도 들어있다. 선진국이란 다름 아니라 문명 차원에서 건축을 논하고 거꾸로 건축을 통해문명을 이끌어가는 능력을 갖춘 건축가가 있는 나라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후진국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신생독립국 미국이 유럽 선진국과 어깨를 견주며 이들을 추월하기 시작한 20세기 전반부에 건축을 통해 미국적 근대성, 나아가 미국이라는 나라전체의 정체성을 정의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광활한 대륙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린 건축을 미국의 근대적정체성으로 제시했으며, 이런 내용을 ‘교외이상’이라는 문명 차원의 가치로 환원해냈다. 한 마디로 교외에서 미래 이상을찾겠다는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이상’이라 하면 첨단기술과 미래 이상을 찾겠다는 것이 보통이다. 더욱이첨단 기술국가 미국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라이트는 의외로 이런 첨단 기술국가미국의 정체성과 미래 이상을 교외, 즉 자연에서 찾은 것이었다. 이개념은 지금까지도 맨해튼의 초고층 건물과 함께 미국 사회, 미국인의 국가관, 가장 미국다운 특징 등을 구성하는 양대 축으로 남아있다.
우리의 현실은 이상과완전히 반대로 가고 있다. 건축주 개개인의 요구를 세밀히 보살펴주는 정성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나 신도시같은 곳에서는 비현실적인 생떼에 해당된다. 이를테면 자동차 한 대 사놓고 엔지니어더러 집에 와서 이것도봐주고 저것도 고쳐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아져버렸다. 원래 이런 일을 해야 되는 건축가들조차도 ‘단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있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도 매우 중요한 가치이자 하나의 능력인데 처음부터 독립적 가치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그런 능력을 배양할 기회조차 갖기 못했다.
문명 차원의 논의는 더 요원핟. 20세기 100년을 식민지배와 압축적 근대화라는 힘든 시기를 겪으며이전 사회의 한국적 정체성은 갈래갈래 찢겨나갔음에도 20세기에 맞는 한국만의 건축모델이나 주거방식 등에대한 고민을 하는 건축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패거리 이루어 소주잔이나 기울이면서 S대 나왔네 H대 나왔네 하면서 싸움질이나 하는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치부하며 살아왔다. WTO에서 FTA를 거치면서 극단성은더 심해졌다. 냉정하게 보아서 70퍼센트의 돈 논리, 20퍼센트의 기술 논리, 9퍼센트의 장식 논리가 지금 우리의 건축을지배하고 있다. 나머지 1퍼센트 내에서 예술적 작품성도 확보해야되고 살기 편안한 인간성도 찾아야 된다. 처음부터 떡 나누기가 잘못된 것이다.
두 번의 위기상황을 거치면서 이렇게 되었다. 서양에서는 두 번의 큰 변화를 거치며 건축가라는 직업, 더 근본적으로건축의 기본속성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르네상스 때로 이때부터 전문적인 직업 예술가가 등장하면서집주인의 요구보다 건축가의 예술성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두 번재는 산업혁명 이후로 기술과 자본이 건축가의예술성마저 앞지르기 시작했다. 건축가의 예술성에 기술과 자본의 논리를 두껍게 덧칠하면서 집주인의 자잘한고민과 소박한 바람 따위는 두 겹의 큰 장벽 뒤에 너무나 하잘 것 없이 묻혀버렸다. 우리나라에서는 개화기이후 일제강점기와 압축 근대화기를 거치면서 짤은 시간에 이 둘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대혼란이었다. 무엇이 올바른 답인지 알지 못하는 사이 이런 혼란과 불안을 잠재워줄 묘약으로 압축 근대화와 부동산 투기가 등장했다. 우리도 후딱 서양처럼 잘살게 만들어주고 돈도 벌게 해준다는데 불안이고 뭐고 문제될 것이 없었다. ‘돈은 안 되지만 개개인의 감성과 고민을 보듬어주는 섬세한 집’ 대‘난폭하긴 하지만 돈이 되는 집’ 사이의 선택의 문제였고, 우리 사회는 어쩔 수 없이 후자를 택했다. 사람들의 본성이란 어쩔수 없는 것이어서 이런 선택의 기로에 몰리면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상황을 이런 기로로 몰고 가지않게 만들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요즘은 솔직히 얘기해서 앞에 열거한 소질따위는 사실 점점 쓸모없게 되어가고 있다. 설계사무소가 대형화되면서 섬세한 소질에 기초한 전문성보다는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 대부분을 차지해가고 있다. 관건은 말썽 안 피우고 로봇이나 기계부품처럼그려내라는 일을 곧이곧대로 핸기만 하면 되는 쪽으로 굳어가고 있다. 그려낸다는 일 자체가 특별한 소질이나잔문성이 필요 없는 단순반복 작업이다.좀 심하게 말하자면 석 달만 학원에 다니면 굳이 건축 전공자가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성실함과 끈기 같은 덕목이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일반적인 직업윤리이지 굳이 건축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P. 46 ~ 51
- p. 23
‘예술가’와 ‘사장님’ 사이에서 - 친절한 아저씨와 문명비평가
건 축은 거창한 것이절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축가를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로 보면서 경외감을 부여하지만 이것은 큰 오해이다. 진정한 건축가는 마음씨 좋은 친절한 아저씨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정확하다. 관건은사람들이 살아가는 조형 환경과 방식에 대한 나만의 제안과 해석의 문제인 것이다. 좋은 건축이란 이런소질을 잘 구현해서 살기 편리하고 편안하고 아늑한 집과 건물을 만드는 것이면 사실 족하다.
좀 더 큰 차원에서보자면 건축적 관점에서 자신이 사는 문명의 성격과 장단점을 정의해서 이상적 방향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즉건축을 통해 문명을 논하고 이끌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능력을 가진 건축가는 서구 선진국에서도매우 드물며 우리나라에서는 전무하다고 보면 된다. 이런 능력은 흔히 학자에게도 똑같이 요구되는 것으로생각하기 쉽지만 종류만 다를 뿐 건축가들에게도 똑같이 요구된다. 선진국과 우리나라를 구분하는 차이 가운데에는이런 건축가의 유무도 들어있다. 선진국이란 다름 아니라 문명 차원에서 건축을 논하고 거꾸로 건축을 통해문명을 이끌어가는 능력을 갖춘 건축가가 있는 나라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는 후진국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신생독립국 미국이 유럽 선진국과 어깨를 견주며 이들을 추월하기 시작한 20세기 전반부에 건축을 통해 미국적 근대성, 나아가 미국이라는 나라전체의 정체성을 정의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광활한 대륙의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린 건축을 미국의 근대적정체성으로 제시했으며, 이런 내용을 ‘교외이상’이라는 문명 차원의 가치로 환원해냈다. 한 마디로 교외에서 미래 이상을찾겠다는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이상’이라 하면 첨단기술과 미래 이상을 찾겠다는 것이 보통이다. 더욱이첨단 기술국가 미국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라이트는 의외로 이런 첨단 기술국가미국의 정체성과 미래 이상을 교외, 즉 자연에서 찾은 것이었다. 이개념은 지금까지도 맨해튼의 초고층 건물과 함께 미국 사회, 미국인의 국가관, 가장 미국다운 특징 등을 구성하는 양대 축으로 남아있다.
우리의 현실은 이상과완전히 반대로 가고 있다. 건축주 개개인의 요구를 세밀히 보살펴주는 정성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나 신도시같은 곳에서는 비현실적인 생떼에 해당된다. 이를테면 자동차 한 대 사놓고 엔지니어더러 집에 와서 이것도봐주고 저것도 고쳐달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아져버렸다. 원래 이런 일을 해야 되는 건축가들조차도 ‘단가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거절하고 있다. 더 엄밀히 말하자면 이것도 매우 중요한 가치이자 하나의 능력인데 처음부터 독립적 가치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그런 능력을 배양할 기회조차 갖기 못했다.
문명 차원의 논의는 더 요원핟. 20세기 100년을 식민지배와 압축적 근대화라는 힘든 시기를 겪으며이전 사회의 한국적 정체성은 갈래갈래 찢겨나갔음에도 20세기에 맞는 한국만의 건축모델이나 주거방식 등에대한 고민을 하는 건축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패거리 이루어 소주잔이나 기울이면서 S대 나왔네 H대 나왔네 하면서 싸움질이나 하는 것을 인간적인 것으로치부하며 살아왔다. WTO에서 FTA를 거치면서 극단성은더 심해졌다. 냉정하게 보아서 70퍼센트의 돈 논리, 20퍼센트의 기술 논리, 9퍼센트의 장식 논리가 지금 우리의 건축을지배하고 있다. 나머지 1퍼센트 내에서 예술적 작품성도 확보해야되고 살기 편안한 인간성도 찾아야 된다. 처음부터 떡 나누기가 잘못된 것이다.
두 번의 위기상황을 거치면서 이렇게 되었다. 서양에서는 두 번의 큰 변화를 거치며 건축가라는 직업, 더 근본적으로건축의 기본속성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르네상스 때로 이때부터 전문적인 직업 예술가가 등장하면서집주인의 요구보다 건축가의 예술성이 더 중요하게 되었다. 두 번재는 산업혁명 이후로 기술과 자본이 건축가의예술성마저 앞지르기 시작했다. 건축가의 예술성에 기술과 자본의 논리를 두껍게 덧칠하면서 집주인의 자잘한고민과 소박한 바람 따위는 두 겹의 큰 장벽 뒤에 너무나 하잘 것 없이 묻혀버렸다. 우리나라에서는 개화기이후 일제강점기와 압축 근대화기를 거치면서 짤은 시간에 이 둘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대혼란이었다. 무엇이 올바른 답인지 알지 못하는 사이 이런 혼란과 불안을 잠재워줄 묘약으로 압축 근대화와 부동산 투기가 등장했다. 우리도 후딱 서양처럼 잘살게 만들어주고 돈도 벌게 해준다는데 불안이고 뭐고 문제될 것이 없었다. ‘돈은 안 되지만 개개인의 감성과 고민을 보듬어주는 섬세한 집’ 대‘난폭하긴 하지만 돈이 되는 집’ 사이의 선택의 문제였고, 우리 사회는 어쩔 수 없이 후자를 택했다. 사람들의 본성이란 어쩔수 없는 것이어서 이런 선택의 기로에 몰리면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상황을 이런 기로로 몰고 가지않게 만들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다.
요즘은 솔직히 얘기해서 앞에 열거한 소질따위는 사실 점점 쓸모없게 되어가고 있다. 설계사무소가 대형화되면서 섬세한 소질에 기초한 전문성보다는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 대부분을 차지해가고 있다. 관건은 말썽 안 피우고 로봇이나 기계부품처럼그려내라는 일을 곧이곧대로 핸기만 하면 되는 쪽으로 굳어가고 있다. 그려낸다는 일 자체가 특별한 소질이나잔문성이 필요 없는 단순반복 작업이다.좀 심하게 말하자면 석 달만 학원에 다니면 굳이 건축 전공자가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성실함과 끈기 같은 덕목이 여전히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일반적인 직업윤리이지 굳이 건축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P. 46 ~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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