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3일 화요일

처음 읽는 독일 철학

칼 맑스

 맑스는 이제, 인간은 생존수단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분되며, 개인들은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가에 따라 서로 구별되고, 개인의 본성은 그들의 생산을 결정하는 물질적 조건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발전시킵니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인간들의 물질적 생산과 재생산의 활동이며 한 사회의 지배계급은 물질적 생산조건을 통제함으로써 사회 전체를 통제한다는 생각, 즉 유물론은 맑스(와 엥겔스)의 이 시기 연구를 통해서 비로소 정초됐던 것이죠. 이러한 유물론적 전환을 통해 그는, 청년 헤겔주의자들이 주요한 비판 대상으로 삼았던 종교는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서 민중으로 하여금 정치 권력의 진정한 토대를 보지 못하도록 만드는 아편의 기능을 한다고 봤습니다. 종교 비판은 정치 권력의 진정한 토대의 발견으로 나아가는 데 필수적이지만, 그 자체가 권력에 대한 비판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권력 비판은 현실의 경제적 관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자신의 실천적 비판을 필요로 한다는 자각은 그의 이후 작업을 일관되게 규정하는 유물론적 문제설정이었습니다. - p.22

 그에 따르면, 노동은 인간의 생명활동이고 자연을 가공하여 자신에게 적합한 것으로 가공하는 활동이자 자연과 신진대사를 하는 활동입니다. - p. 28

 정치학적 맥락에서 자본은 노동을 직접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에 대한 지배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합니다.
 그 런데 노동력 상품은 아무 때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수한 시기에 출현합니다. 노동하는 직접 생산자가 생산수단으로부터 유리된 상황에서만, 그래서 생산수단과 결합하여 노동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시장에 내다 팔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서만 노동력이 상품으로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노동력 상품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직접 생산자들을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다시 생산수단과 결합시키기 위한 매개 장치입니다.
 맑스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직접 생산자의 분리라는 상황이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한 것이 아님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생산자로부터 생산수단을 폭력적으로 분리시켰던 피의 투쟁의 역사를 거쳐 역사적으로 발생한 사태이니다. 맑스는 그것을 '시초 축적'이라고 불렀스니다.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여성으로부터 그녀의 친숙한 환경을, 자유인들로부터 고동체를,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교류수단인 화폐를 폭력적으로 분리시키는 내전을 거쳐서 자연, 공동체, 그리고 각종의 생산수단들은 자본에 의해 독점적으로 장악되어 노동자와 대립하는 것으로 정립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시장에 내다파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갖지 못한 특수한 역사적 존재가 창출됩니다. 이것이 맑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프롤레타리아트의 노동력은 시장에 상품으로 등장하지요. 프롤레타리아의 생명 활동인 노동이 이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는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의 기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p. 30

 즉 노동력은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상품입니다. 노동력을 구매한 자본은, 노동력의 실현 과정인 노동 과정을 통제함으로써 노동력이 그것의 가치 (즉 그것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 이상의 가치를 생산하도록 노동자를 강제합니다. 그 강제의 방식으로 역사적으로 변화합니다. 노동의 절대시간을 늘리거나 노동 강도를 높이는 것 등이 그것이지요. 자본가에게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단순히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임금으로 지불한 것인 노동력의 상품가치 이상으로 새로운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자본에 의해 강요되는 바에 따라,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의 재생산 시간인 필요노동시간 이상을 노동하게 되는데 이 시간이 바로 잉여노동시간입니다. 잉여노동시간에 생산되는 가치는 노동력을 구매한 산업자본가에게 모두 귀속됐다(착취)가 토지 자본(지대), 은행 자본(이자), 상업 자본과 산업 자본(이윤)에 분배됩니다. - p. 31

은행 제도와 주식회사 제도의 발전은 화폐의 소유자와 이용자를 분리시켜 자본주의 속에서 사적 소유가 지양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맑스는 그래서 주식회사를 사회주의로의 이행 형태, 자본의 사회주의라고 불렀습니다. - p.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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