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 22일 월요일

세계 철학사 - 옮긴이의 말

'철학'을 뜻하는 서양 언어, 예컨대 독일어 'Philosophie'나 영어 'philosophy'가 어원상 '지혜에 대한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일견 자명하게 여겨지는 이 어원적 정의는 우리의 생각을 자극하는 여러 가지 물음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지혜'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지혜를 향한 '사랑'이란 어떤 종류의 것인가? 이 사랑은 다른 대상에 대한 애착이나 추구 내지 신봉 등과 다른 것인가? 만약 다르다면 어떤 점에서 다른 것인가? 더 나아가 지혜에 대한 사랑은 그것을 품은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남기는가? 그런데 이런 유의 모든 물음과 더불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도 철학이 '지혜 자체'나 '지혜의 소유'가 아니라 '지혜에 대한 사랑'으로 정의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에 대한'은 분명 일정한 '거리'를 함축하고 있다. 이 거리가 뜻하는 것은 대체 무엇이며, 이는 어디서 연원하는 것인가?

 철학은 '경이' 내지 '경탄'에서 시작된다는 말도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여기서 경이란 평소 당연하게 여겨 왔던 것을 전혀 당연하지 않은 사태로 경험한는 것을 일컫는다. 예컨대 우리가 태어나 살아가는 친숙한 이 세계에 대해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이런 물음을 품을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왜 있는가? 이 모든 것은 왜 없지 않고 있는 것인가?" "세상을 이루는 이 모든 것은 어떻게 해서 있게 된 것인가?" "도대체 있음과 없음이란 무엇인가?" "이 세계는 정말로 있는 것인가?" 더 나아가 "이 세계 안의 나, 이런 의문을 품은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와 더불어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이 사람과 저 사람, 아니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모든 물음-그리고 이와 관련된 무수한 물음-은 당연히 해답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 해답을 신화와 같은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니라 논증의 방식에 의해 제시하려 할 때, 다시 말해 정의를 제안하고 주장을 제시하며 확증과 반박을 모색하는 방식으로 추구할 때 철학은 시작된다.

 경탄과 물음 그리고 모색의 결실인 이 해답들은 앞서 말한 '지혜'와 연관이 있다. '지혜'란 아마도 궁극적이고 근복적인 해답 혹은 최고 형태의 해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인간을 포함한-전체로서의 세계란 인간에게 남김없이 해명되기는커녕 표상조차 불가능한 대상이다. 따라서 궁극적 해답으로서의 '지혜'란 인간이 다다를 수 없는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계속적이고 새로운 추구로 이 이상에 접근하려 애쓸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인간의 사유 작업, 달리 말해 철학이란 결코 '지혜 자체'나 '지혜의 소유'가 아니라 '지혜에 대한 사랑'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 '~에 대한'이 함축하는 거리는 인간적 한계의 자각을 표현한다.


 물 론 철학은 사랑이기에 이 거리에 대한 자각에 머물지 않는다. 철학은 이 거리에 대한 자각에 머물지 않는다. 철학은 이 거리를 좁히려는 부단한 운동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철학은 그 비궁극성 내지 잠정성으로 인해 역동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릭 운동의 성격을 갖는 모든 것이 시간 내에서 전개되듯, 철학이란 사랑도 시간 내에서, 달리 말해 역사 속에서 전개된다. 이 역사는 물론 여러 층위에서 다양한 형태로 존립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개별 사상가나 특정 지역, 특정 시기의 철학적 조류 혹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인류의 모든 철학적 노력을 고찰하려 할 때, 그 어떤 운동 내지 역사를 확인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요아힘 슈퇴리히가 말하듯- 철학에 대한 관심과 탐구는 철학사에 대한 이해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게 된다.

 철학사라는 이 독특한 사랑의 역사에는 '원칙적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인류가 가담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이 운동과정에 대한 '서술'로서의 철학사에는 -지금까지 지상에 존재했던 모든 인간의 수와 비교할 때- 극소수의 인간들만이 등장한다. 철학자 혹은 사상가라 불리는 이들은 사유의 독창성과 철저함, 일관성이란 점에서 그 어떤 전범을 보인 사람들이며 그런 이유에서 기록과 전승의 가치를 부여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철학사 서술의 목표는 이러한 인물들의 사유를 소개하고, 설명함으로써 철학의 실례를 보여 주고, 더 나아가 독자 스스로 철학하는 것을 배우게 하는 데 있다.

 한스 요아힘 슈퇴리히의 《세계 철학사》가 추구하는 목표도 다르지 않다. 이 책은 '지혜에 대한 사랑'의 여러 가지 역사적 양태를 소개한다. 그리고 독자 스스로가 자신의 구체적 삶과 연관된 사랑법을 터득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이때 저자는 난해하기만 한 사상 모델들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하는 동시에 그러한 사상 모델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지 않으려 애쓴다. 일견 상충하는 이 두 가지 요건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데 저자가 어느 정도나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평가가 내려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에 걸쳐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이 책이 거둔 성공, 독작들의 열렬한 호응은 이 책이 저자의 당초 목표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음을 어느 정도 입증해 준다.

 철학에 전문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이 책에서 불충분한 점도 발견할 것이며 다음과 같이 불만을 표출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의 철학을 고대에 국한해서 다루는 것은 '세계 철학사'란 이름에 값하지 못하는 서술태도가 아닌가? 또한 현대 프랑스 사상을 단 몇 쪽으로 요약해 버리고, 아도르노와 하버마스를 마르크스주의에 포함시켜 간단히 논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책 역시 '지혜에 대한 사랑'이 낳은 한 가지 결과물로 보기로 하자. 모든 사랑은 거리의 소멸, 이른바 완성을 원하지만, 거리는 사랑의 성립 조건이라는 것-이 바로 사랑의 역설이다. 그리고 이 역설은 모든 사랑이 불완전성의 운명을 지고 있음을 가리킨다. 앞서 말했듯, 철학사에 등장하는 사상가들은 '지혜에 대한 사랑'을 완성시킨 사람들이 아니라-사랑의 탁월한 사례를 보여 준 사람들이다. 슈퇴리히의 책 역시 하나의 사례이며, 아마 철학사로서는 출중함이란 이름에 값하는 사례일 것이다.

 『세계 철학사』 옮긴이 '박민수'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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